이건 입시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입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어쩌면 내 삶의 태도에 대한 이야기인 것도 같다.
지금은 이십대 후반이 되어서 입시 이야기를 하면 정말 구려 보이는 나이가 되었지만,
이십대 중반까지만 해도 이 입시 썰을 바탕으로 나를 설명하는 게 정말 용이했었다.
왜냐하면, 이과논술과 문과논술, 그리고 문이과통합 학생부종합을 모두 합격했었기 때문에.
잡탕찌개이면서 '자극추구'형인 나를 너무 잘 설명해주는 일화였던 것이다.
이제는 어디 가서 말로 이걸 설명하기에는 조금 창피하게 되었으니...
블로그에라도 남겨두려 한다.
중학생 때 전공을 정하다
먼저 중학생 때 이야기부터 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이과 - 아트앤테크놀로지 - 인문대학원에서 사회과학 연구 / 라는 (좋게 말하면 독특하고 나쁘게 말하면 어중이떠중이인) 이력을 가지고 있다.
이 여정 아닌 여정을 시작하게 된 건 중학교 2학년 때다.
난 국어와 과학을 좋아했다. (수학은 별로 내 취향은 아니었으나... 지금은 유튜브에서 푸리에 변환과 우박수 등을 찾아보는 이상한 어른이 되었다... 머리 팽팽 돌아갈 때 좋아할 걸 그랬다,. ㅋㅋㅋ)
이과적 측면도 있고 문과적 측면도 있는 나는 어떤 전공을 선택해야 할 지 고민하기 시작했고,
그러던 중 아트앤테크놀로지라는 학과를 친구 어머니를 통해 알게 되었다.
학과 홈페이지를 찾아봐도 도통 뭘 하는 학과인지 알 수 없는데,
선배들은 너무 멋지고, 맥이 가득한 랩실은 너무 깔쌈하고, 포용력 있는 교수님은 만나고 싶고, 내가 거기서 뭘 하든 존중받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그런 알 수 없는 학과.
그 때는, 내 선택을 유보할 수 있다는 사실에 큰 매력을 느꼈던 것 같다. 둘 다 해보고, 내게 원하는 걸 찾을 수 있다는 그런?
근데 이제 와서는, 그걸 선택을 유보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미 선택을 했지만, 내가 욕심이 너무 많은 바람에 세상이 나에게 맞춰줄 수 없기 때문에, 내가 고를 수 있는 것을 골랐다고 해야 할까?
세상이 마음에 안 드니까 그게 가능한 세상을 갖고 싶었다.
하지만 아텍 하나만 보고 입시를 할 수는 없었기에, '문과를 선택하면 나중에 이과를 하고 싶을 때 이동하기 어렵지만 이과를 선택하면 나중에 문과를 하고 싶을 때 이동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이과를 선택했다.
원서를 넣다
고3이 될 때까지, 내 수시 원서 하나는 무조건 아텍이었다.
두 개를 넣을지, 한 개를 넣을지 고민이었을 뿐 넣는 건 확정이었다.
물론 주변에 있는 모든 선생님들이 말렸다. 학교 선생님이건 학원 선생님이건 다 뜯어말렸다.
우리 동네는 학군지이긴 했지만 대치동 같은 동네는 또 아니었고,
또 아텍은 시중에 풀린(?) 자소서가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선택하지 않아 후회하는 것보다 선택해서 후회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고,
혼자 자소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선택을 해야 그 선택의 결과를 내가 감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다른 어른을 원망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는 싫었다.
나머지 수시 5장은 건축학과를 골랐다. 건축학에 대한 이해가 없었기 때문에 했던 선택이었다. 문과적 인사이트와 이과적 인사이트, 예술적 인사이트가 모두 필요한 전공이니까 그걸 살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내가 상/하향을 정하면서 고른 학교 하나에 건축학과가 없어서, 생활과학대의 다른 전공을 골랐다.
그 대학은 특이하게도 이과논술에 문과논술 지문 하나를 섞어서 출제하는 대학이었는데,
나는 글쓰는 것에 자신이 있었기에 이 대학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
(물론, 학원 선생님은 '그러면 거기서 너 뽑아 준대? 다른 데 넣어!'라면서 내 용기를 꺾었지만!!!
그 선생님은 내가 글 쓰는 것을 본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뚝심 있게 그 전공을 그냥 넣어버렸다.)
결과적으로 이과논술 5개, 학생부종합 1개를 넣었던 셈이다.
그런데 그 다음에 문제가 발생했다...
논술 지원을 잘못하다,,,,,,,,,
나는 딱히 긍정적인 사람이 아니다. 부정적인 사람도 아니고.
반대로 별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감정을 느끼긴 하는데,
그 감정에 시달려봤자 차이가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냥 내 감정을 그 상황에 맞춰 버린다.
수능을 치룬 후 논술 시즌.
나는 생활과학대의 논술 일정이 다른 대학 논술 일정과 겹치는 걸 알게 됐다... (논술 일정은 원래 나중에 나와서, 입시 전략을 잘 짜야 한다)
그래서 둘 중 하나를 선택했어야 했는데, 내가 좀더 가고 싶은 대학은 후자의 대학이었다.
하지만 그 대학은 논술이 너무 쉬워서 하나의 실수만으로도 떨어질 수 있다는 악명이 높은 대학교였기 때문에... 많은 고민이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생활과학대 논술 지원자 목록에 내 이름이 없는 것이다. ㅋㅋㅋㅋㅋ 벼락과도 같은... 놀랄 노자의 경험이었다. 아직도 그때 두근거리던 심장의 감각이 생생하다.
하... 근데 알고 보니. 내가 지원한 전공은 생활과학대에서도 유일하게 문과로 분류되기 때문에 문과 논술을 보았어야 했던 것이다. 난 그것도 몰랐고. 이걸 전날에 알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뭔 정신으로 살았는지 ㅋㅋㅋ
맞다... 졸지에 한 번도 준비한 적 없는 문과 논술을 봤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시 생각해봐도 뭔 정신이었는지 모르겠는데) 기분이 너무 좋았다!!!
- 일단, 시간이 안 겹치게 되었으니 둘 다 볼 수 있게 되었고.
- 문과 논술 학원을 다닌 다른 학생들과 달리 내 순수한 글쓰기/문제파악 실력으로 시험을 치른다는 게 묘하게 흥분이 됐다!
그래서 나는, 왜 그랬냐고 타박하는 부모님에게 "그래도 둘 다 볼 수 있게 됐으니 좋은 거 아니냐" 쿨하게 말하고.
자릴 털고 일어나서 원고지 사용법을 프린트해 외우기 시작했다.
시험을 볼 때도 전혀 떨지 않았다. 잘 쓴 것 같기도 했고... 무엇보다 떨어져도 부끄러울 게 전혀 없었으니까. ㅋㅋㅋㅋ
그래서 어떻게 됐냐. 결국 그 문과 논술은 붙었다.
다른 이과 논술 하나를 붙었고 아텍을 붙었으니,
문과논술, 이과논술, 문이과통합 학생부종합 하나씩 붙은 거다.
내가 다니던 수학과학 학원은 신이 나서 내 이름을 데스크 앞에 붙였다.
나에게 '그 학교가 널 받아줄 것 같냐'고 타박했던 선생님이 그걸 볼 걸 생각하니 정말 짜릿했던 기억이 난다.
어쩌면 이 일화는... 내 대책 없음과 무계획성, 멋대로 사는 태도를 증명하는 일화일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위의 단점과 연결되고 또 반대되는,
내 '좌절하지 않음'과 '자신감', '높은 적응성', 그리고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해 감정을 배제할 수 있는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철 없(어도 되)던 20대 초중반 시절에 저 썰을 종종 풀었던 것이고...
지금은 나이가 차서 못 풀지만. ㅎㅎ
저때의 나를 잘 설명해주는 일화이기에, 블로그에도 잘 적어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