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자기 밑에서 일할 누군가를 데려다 자기 마음대로 키울 수 있는 권력을 지닌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그런데 이 사람이 지닌 재능과 권력에 비해 이 사람이 이끄는 조직은 잘 크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을 정말 정말 자주 만난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극단적인 통제광이고, 뛰어난 자신에게 취해 있으며, 자기 밑에서 일하는 사람을 '언제나' 못마땅해한다. 이런 사람들이 직속부하에 대해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있다.
OO대리, 일 잘해서 데리고 왔더니 XX일을 못해서 내가 얼마나 짜증이 나던지...
기본적으로 이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자질을 탐내고 그걸 가진 사람을 자신의 수하로 만들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데려다가 자신의 클론으로 만들려 한다. 애초부터 자신과 비슷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데려오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통제 가능하려면 자신보다 잘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슷한 종류의 재능을 지니면 자신과 너무 쉽게 비교가 되거든. 게다가 어쨌든 이들도 생각이란 것을 하는 능력있는 사람들이기에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모이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어서 반대되는 성향의 사람을 데리고 오는 것이기도 하다. 가장 큰 문제는 자신과 전혀 다른 재능을 가진 사람을 데리고 와서, 자신처럼 하지 못한다고 기를 죽인다는 것이다.
최고로 올라서기 때문에 더 최악이다
이 사람들 눈에는 뭐든 자신이 최고이고 천재다. 모두를 그저 그런 사람으로 만듦으로써 본인만은 빛이 나며 계속 자신의 위치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더 최악이다. 그 사람은 조직 내에서 최고가 됨으로써 자신의 자리를 유지할 것이고, 추가로 희생자를 더 만들 것이다. 그렇게 그 사람은 그저 그런 조직에서 최고인 사람이 될 것이다. 완전한 악순환이다.
본인들이야 세기의 인재를 만들겠다고 가슴 두근두근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상상 속 존재는 세기의 일잘러가 아니라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괴물일 뿐이다. 세기의 일잘러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 정도의 우수한 인재는 저렇게 무능한 통제광 리더로부터 빠르게 탈출한다. (똑똑하니까...)
일을 잘한다고 '그 일'까지 잘하지는 않습니다
창의성을 발휘해 다른 사람들의 업무능력을 끌어올리고 조직에 혁신을 가져오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이런 사람은 일을 잘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무능한 통제광 리더는 이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일을 잘하게' 만들려고 한다. 불가능한 목표다.
인간의 성향은 제로섬 게임이고, 어떤 재능은 성향에서 나온다. 기본적으로 '공존할 수 없는 성향'이란 게 있다. 창의력이 넘치기 위해서는 다양한 것을 경험하고 매일 새로운 것을 생각해내야 한다. 창의력이 넘치는 사람들은 공상가이자 몽상가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에만 집중할 수 없고, 규칙에 얽매일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자유분방한 몽상가를 데려다가 '몽상가이면 안 되는 자리'에 놓는다면? 반대로 매사에 꼼꼼하고 무조건 계획을 지키며 "완벽한 결과물보다는 안전한 결과물"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뱉어내라고 한다면? 불가능한 것을 시키는 것을 넘어, 비효율적이다. 이것은 일론 머스크의 머리가 좋으니까 머스크에게 우울증 환자의 면담을 시키자는 말이나 다름이 없다. 아마 그 환자는 머지않아 머스크의 머리를 총으로 쏘고 본인도 자살해버릴지도 모른다.
신중한 사람은 답답하다. 감각적인 사람은 예민하다. 관용적인 사람은 무디다. 그런데 신중해서 뽑아 놓고 답답하게 굴지 말라 호통치고, 감각적이어서 뽑아 놓고 예민하다며 창피를 주며, 관용적이어서 뽑아 놓고 무디다고 혼을 낸다.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르다,
기분의 문제가 아니라 메시지의 문제다
물론 조금의 중도를 지키는 건 좋은 일이다. 지나치게 꼼꼼한 사람에게 약간의 유연성을 갖추게 해주는 것은 필요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약간의 유연성을 갖추라고 말하는 것과 너의 꼼꼼함은 틀렸다고 암시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인간은 완전한 변화를 위해 자신의 타고난 성향을 죽이는 데에 모든 에너지를 다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너의 꼼꼼함이 너무나도 좋지만 한편으로는 너의 꼼꼼함이 일을 다 망쳐버린다고 인신공격을 하게 되면 청자는 그 상충된 메시지에서 혼란을 느낀다. 말만 깔끔하게 하면 되는데,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메시지를 오독하지 않게 불필요한 에너지를 소모하게 만드는 것이다.
무능한 리더는 소모하고 소진한다
무능한 통제광 리더는 자신이 통제 가능한 작디작은 범위를 상정해 성장게임을 생존게임으로 만들어놓고는, 자신은 이 게임에서 생존한 사람을 인정할 수 있다고 떠들어 댄다. (물론 생존자는 없다. 생존자가 있다면 이 사람은 자신의 어마무시한 가치를 깨닫고 자신의 재능을 꽃피워줄 다른 조직으로 떠난다.)
하지만 유능한 리더는 '소모적인 것'을 혐오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타고난 성향과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에서 편안해한다. 그 편안함 안에서 최고의 효율을 발휘할 수 있고 최고의 '성능'을 낼 수 있다. 유능한 리더는 물론, 구성원이 업무 환경에서 맞닥뜨릴 수 있는 불편한 환경 안에서도 높은 효율을 발휘하게 만들려 하지만, 그 사람이 최고로 불편해할 상황에 처넣은 채 담금질하지 않는다. 그런 환경에서 소모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에너지가 얼마나 큰지 알기 때문이다. 하나를 잘하는 사람을 데려왔으면 그걸 더 잘하게 만들어주면서 다른 걸 잘하는 사람과 잘 소통하게 만드는 게 '효율적'이다.
정말 유능한 리더는 사람이 지닌 재능을 활용하여 반대되는 재능을 흉내낼 수 있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리더들은 자극추구형인 사람이 매일 같은 일에도 열정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 매일 같은 일을 달라보이게 만드는 방법을 체화하게 만든다.
유능한 리더는 자신이 가진 한정된 자원으로 최대의 효율을 낸다. 포지션을 예로 들자면, 디자인도 어느정도 잘하고 개발도 어느정도 잘하는 사람 둘보다는 디자인을 기깔나게 잘하고 개발은 못하는데 개발자와 소통을 잘하는 사람과 개발을 기깔나게 잘하고 디자인은 못하는데 디자이너와 소통을 잘하는 사람의 '조합'이 조직의 발전에 이롭다. 그게 불가능한 조직이라면 유능한 리더는 '외주'를 준다. 돈이든 인맥이든 자신이 지닌 어떤 자원을 활용해서, 조직 내 사람들에게 할당된 시간을 0시간 소모해서 좋은 결과물을 만들고, 그 좋은 결과물을 조직 내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안목도 키워준다.
차라리 싸워보게 하는 게 낫다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는 재치있는 방법을 떠올리는 규칙파괴자 김파괴와 예외 없이 규칙을 지킴으로써 길을 벗어나지 않게 해주는 이지켜가 있다고 해보자. 김파괴와 이지켜는 분명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싸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대화를 통해 그들은 서로를 배울 것이고 그걸 지켜보는 다른 사람들도 무언가를 배울 것이다. 김파괴와 이지켜의 인품이 올바르고 리더가 이들의 논의를 생산성 있게 이끈다면 김파괴는 이지켜와 소통하는 법을, 이지켜는 김파괴와 소통하는 법을 배울 것이다. 그리고 김파괴는 이지켜가 지키는 일에 얼마나 뛰어난지, 이지켜는 김파괴가 파괴하는 일에 얼마나 뛰어난지 깨닫고 서로를 신뢰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둘은 파괴하기만 하거나 지키기만 하는 길이 아니라 '우회하는 길'을 찾아낼 것이다.
소통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상대의 사고회로를 이해한다는 것이고, 이를 통해 상황에 따라 상대의 사고회로를 적용할 수 있게 된다. 조직은, '내가 이 면에서 부족해도 다른 이가 이 면을 보완해줄 것이고, 그 다른 이의 부족함은 내가 채워줄 것이다'라는 강력한 소속감과 신뢰 안에서 건강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조직은 모든 상충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는 말도 안 되는 사람들을 모아둔 곳이 아니다. 조직은 각자의 재능이 서로를 보완하도록 만들어진 집합체이자 군체이다. 꿀벌 군체에서 일벌들이 알을 낳으려 들고 수벌들이 일을 하려 들고 여왕벌이 집을 지으려 든다면 그 군체는 멸망한다.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그것이 다른 이의 결점을 보완하기 때문에 군체는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정말 의외로 통제광들은 즉흥적인 것 같다. 이들은 자신이 계획적이라 홍보하고 스스로 그러기를 바라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않다. 모든 상황과 사람이 자신의 통제 하에 있어야 한다는 감각은 계획적으로 유지될 수 없다. 누군가는 분명 통제광의 계획에서 벗어날 것이고, '광적'일 정도의 통제에서 발생하는 돌발상황은 감히 인간이 대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광적인 통제를 원한다는 것은 통제에서 벗어난 그 무엇에도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처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면 통제에서 벗어난 요소에 광적인 불안감을 느끼지 않으니까.
통제광은 역설적으로 그 어떤 것도 통제할 수 없으며 그 어떤 것도 예측할 수 없다. 이들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회사에서 언제 똥을 누러 갈지 결정하는 것 정도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