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학 과목의 꽃은 뭐니뭐니해도 페이퍼. 수업은 어찌저찌 해결했다고 쳐도, 페이퍼가 문제였다.
영문학은커녕 유명한 인문학 이론들까지도 아는 게 없는 나 같은 무지렁이에게 페이퍼 작성을 위한 리서치는 정말 고통의 연속이었고 이걸 모국어와 어순도 다른 언어로 풀어내려니 고문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내가 영문학도들보다 잘하는 게 있었다. 스키밍, 즉 정보 훑어보기와, 자료검색이다.
자료 리서치
IT 융합학과에 있으면서 트렌드를 파악하려면 눈이 빨라야 하고 키워드도 재빠르게 잡아내야 하기 때문에, 나는 속독에 능한 편이었다. 그래서 무작정 학교 도서관 학술자료에 주제나 메인 텍스트와 관련이 있는 키워드를 검색한 후 닥치는 대로 다운로드받았다. 그러고 나서는 엄청나게 빠르게 훑은 다음 나에게 필요한지 아닌지 걸러냈다. 그 다음엔 그 안에서 나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를 추리고, 그와 관련된 인용문헌을 수집했다.나에게 가치 있는 것으로 판단된 문헌들에서 유독 자주 언급되는 학자가 있으면 그 학자의 이름을 구글북스에 검색한 다음 가장 위에 나오는 서적을 검색해서 그 학자의 주요 논조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한 분야에 대해 아예 문외한이었던 내가 기댈 건 구글의 알고리즘이었던 것이다.
내가 했던 리서치는 내가 가진 모든 재능과 스킬을 총동원해서 했던 난잡한 작업이었기 때문에 사실 말로 설명하기는 굉장히 어려운 것 같다. 어쨌든 대충 설명하자면 위와 같았다.
생각 정리를 도와주는 노션
굿노트로 간단하게 아이디에이션을 한 뒤, 개요를 짤 때에는 노션을 썼다. 물론 그냥 메모 앱 써도 되고, 종이에 적어도 된다. 하지만 개요를 짜는 데에 내가 노션을 사용한 이유는 노션이 블록 베이스의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문장을 마우스로 그냥 잡아다가 이동시킬 수가 있다는 거다. 노션은 아래와 같이 문장 순서를 이동하기가 굉장히 편하다. 이 기능은 에버노트에서도 제공한다.
아직 이렇다할 구조화된 아이디어가 없을 땐 아이디어의 순서를 바꿔보기도 하고 잠시 빼보기도 하고 넣어보기도 하지 않나. 이때 노션의 블록 이동 기능이 굉장히 유용했다. (에버노트도 되긴 하는데 뭔가 좀 부족함.)
순서뿐만 아니라 계층화도 편하고, 정돈되지 않은 아이디어는 토글(Toggle) 기능을 사용해 잠시 숨겨둘 수도 있다.
더 강력한 기능도 있다. 바로 목차 기능이다. 노션에서는 대제목, 중제목, 소제목이 있는데 해당 제목들로 바로 이동이 가능한 목차를 생성할 수가 있다. 영어 노션을 사용하는 유저라면 '/table of contents'로 알고 있는 그 기능이다.
개요 정돈을 도와주는 엑셀
내용을 구조화할 때는 엑셀을 썼다. 문장과 문단의 순서를 수정하기도 용이한 데다, 영어문장이 곧장 생각나지 않으면 한국어로 적어두기에도 편한 방법이다. 엑셀 함수를 이용하면 글자수 맞추는 것도 한결 쉬워진다.
무엇보다 가장 좋은 점은 문단별, 문장별 글자수를 셀 수 있고 글의 구조를 한눈에 볼 수 있다는 건데, 특정 문단이 너무 길어진다거나 의미가 같은 문장이 이곳저곳에 중복돼서 들어간다거나 하는 초보자의 실수를 미연에 방지할 수가 있다. 칸 단위로 쪼개지다 보니 뭔가 다듬어야겠다 싶은 문장의 글자색을 바꾸기도 용이하고.
(2021년에 들어서는 macOS 기본 프로그램인 Numbers로 갈아탔다.)
엑셀의 최대 단점은 칸을 복사해서 워드나 한글 등의 워드프로세서에 붙여넣기하면 표가 그대로 살아난다는 건데, 서브라임 텍스트를 쓰면 해결된다. 글을 서식 없는 플레인 텍스트로 바꿔주는데다, 찾기 기능으로 줄바꿈도 제거할 수 있다.
킨들과 알라딘
그냥 교양으로만 알고 있거나 아예 모르고 있었던 인문학/사회학 이론도 전부 새로 읽고 공부해야 했다. 이번 학기에 다운로드받거나 빌려보거나 구매한 학술자료만 해도 수십 가지가 된다. 빌려 보고 사서 보고 e북으로 보고 했다.
e북은, 단어를 찾을 때는 프로젝트 구텐베르크(https://www.gutenberg.org/)를 쓰고, 나머지 웬만한 건 킨들(Kindle)이나 알라딘 e북을 애용했다. 인용문헌 적을 때는 인용하고자 하는 부분을 구글북스에 검색해서 페이지를 찾아내서 적었다. 구글북스에 없는 책이면 그래도 학교 도서관에는 웬만하면 있어서 빌려서 적었다. 왜 처음부터 종이책으로 안 봤느냐 하면, 자료 서치할 때 불편하니까.
사실 내가 영문학 수업들을 들으면서 했던 노력들은 도저히 하나의 글로 표현할 수가 없는 것들이어서 쓸까 말까 고민을 했다. 팁 하나하나를 쪼개서 글을 쓰는 게 나을 정도로 다양한 방식의 학습을 시도했고 여러 툴을 함께 섞어서 이용하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미루다가 영영 못 쓸 것 같아 두서 없는 글이지만 적어봤다.
처절하긴 했지만 의미 있는 시간들이었다. 2020년에 쓴 영문 글들을 읽어보면 그 발전이 어마어마하다. 나에게 영문학 수업을 들으라고 했던 언니도 내 글이 정말 많이 발전했다고 했다. 문장구조도 좀더 영어스럽게 바뀌고, 아카데믹한 글다운 형식도 갖추게 됐다.
거기다가 수업에 참여하느라 읽고 듣고 말하는 연습도 했으니, 리스닝, 리딩, 라이팅, 스피킹을 전부 다 잡은 한 학기였다고나 할까. 대학생이 내 글을 읽는다면 정말 영어강의를 듣기를 추천하고 싶다. 전화영어나 영어학원보다 훨씬 도움 된다. 허튼 데 돈 쓰지 말고 이미 낸 등록금 뽑아먹자.
그리고 무엇보다 정말 재미있었다. 소설과 시를 읽을 때 저명한 이론이나 창의적인 주장에 비추어 그렇게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경험을 하기가 어디 쉬운가. 빅토리아 소설 수업에선 한 학기 내내 <제인 에어>와 <위대한 유산>만 읽어댔더니 강제로 사랑에 빠져버렸다.(솔직히, 진도 따라잡느라고 이 두 소설은 한국어로 읽었다. 페이퍼 쓸 땐 영어로 읽었지만.) 스스로 디비피아에서 한국어 논문들도 찾아서 봤다. 재미있어서.
다음 글에서는 두 개의 유럽문화 과목을 공부했던 경험에 대해서 써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