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맥북과 아이패드를 사용하는 소위 '앱등이'다. 정확한 모델은 맥북 프로 터치바 19년형과 아이패드 프로 2세대. 어쨌든 '프로'가 붙었으니, 애플 라인 중에서도 중고가에 속하는 제품군이다. 하지만 내 휴대폰은 기기가 40만원대의 저렴한 보급형 안드로이드폰인 삼성 갤럭시 A50이다.
애플 제품끼리는 에어드랍과 아이클라우드라는 아주 큰 메리트가 있기 때문에 보통 앱등이들은 모든 제품을 애플로 맞추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는 맥북 에어와 아이패드 에어를 거쳐 맥북 프로와 아이패드 프로를 사용하는 지금까지도 단 한 번도 아이폰을 사용한 적이 없다.
가격
아무래도 가장 큰 이유는 가격이었다.
노트북이나 태블릿 PC 같은 경우, 소모품이긴 해도 나에게 맞는 제품에 약간의 스펙 옵션을 더해서 구매해 관리만 잘 한다면 10년도 쓸 수 있다. 저렴한 제품을 여러 번 사느니 고가의 제품을 한 번 사서 오래 쓰는 게 내 지갑에나 지구 환경에나 더 경제적. 더군다나 나는 전공 특성상 1테라짜리 외장하드를 소지하고 다니고, 아이클라우드나 구글드라이브 같은 클라우드 서비스를 애용하기 때문에 저장 장치를 잘 혹사시키지 않는 편이다. 노트북이 느려지는 주원인이 저장 장치임을 생각해보면 내 노트북 수명은 길 것이 자명하다.
하지만 스마트폰은 워낙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고 영하의 온도나 욕실의 습기 같은 극한의 상황에도 자주 노출되는 데다 충전과 방전이 잦아서 3년이 되기 전에 죽어버리는 게 부지기수다. 이전에 썼던 휴대폰은 신기하게도 딱 2년째가 되기 바로 전날 벽돌이 됐더랬다. 사실 그런 게 아니더라도 휴대폰은 유행을 타기 때문에 멀쩡해도 바꾸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게다가 스마트폰 스펙의 발전에 발맞추어 게임 등 무거운 어플리케이션의 요구 스펙도 매해 큰 폭으로 커지다 보니, 모바일 게임을 즐기는 유저라면 더 빠른 주기로 스마트폰을 바꾸는 것 같다.
이렇게 짧게밖에 못 쓰는 휴대폰에 50만원 이상 돈을 쓰는 건, 지독한 가성비추구자인 나에게 너무나 아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아이폰도 중저가에 구매할 방법이 없지는 않다. SE라는 보급형 모델도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폰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기능 분리와 라이트닝 젠더 때문이었다.
기능 분리
나는 노트북과 태블릿PC, 휴대폰의 용도를 엄격하게 나눠서 사용하고 있다.
일단 휴대폰으로는 뭘 많이 하지 않는다. 간단한 웹 서핑과 카카오톡 연락 정도만 한달까. 주로 사용하는 기능도 밤중에 물건을 찾을 때 켜는 손전등 뿐이다. 휴대폰은 본인인증과 관련이 있는 기기이다 보니 금융 업무도 주로 휴대폰으로 하기는 한다. 주식이나 펀드 매매, 송금, 입출금, 월급 확인 같은 태스크들. 놀러 다니면서 사진을 찍는 것 정도는 휴대폰으로 한다.
하지만 넷플릭스도 아이패드로 보고, 모바일 게임도 아이패드로 하고, e북도 아이패드로 읽고, 그림도 아이패드로 그린다. 다시 말해 엔터테인먼트 기능은 전부 아이패드로 몰았다. 하나 예외가 있는데, 웹툰은 휴대폰으로 본다. 휴대폰이 화면이 작긴 해도 종횡비가 세로로 길어서 웹툰을 볼 때는 휴대폰이 제일 편하니까.
그리고 영상편집이나 디자인 같은 험한 작업은 노트북으로 한다. 애초에 그러려고 샀다.
이렇게 기능을 분리했기 때문에, 아이폰의 에어드랍이나 아이클라우드는 나에게 있어서 장점이라기보단 단점이었다.
휴대폰으로는 사진을 찍거나 톡을 하는 등 내밀하고 사적인 태스크를 수행하는데, 이런 태스크를 수행한 흔적이 작업용 맥북이나 작품활동 또는 엔터테인먼트용 아이패드와 손쉽게 공유되면 이 경계가 허물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오히려 그 벽을 차단함으로써 나는 기능을 더 엄격히 분리하고, 따라서 보다 효율적으로 기기들을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기능을 분리하면 한 기기에서 과중한 태스크를 하지 않게 되므로 기기 각각의 수명도 길다. 지금 사용하는 A50은 사용한 지 만 3년째, 쿠키런 킹덤 버벅거리는 것 말고는 별 이상은 없다. (어차피 쿠킹덤은 아이패드로 함.) 얘도 언제 갑자기 맛이 갈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기기를 여러 개 사는 게 더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는 있으나, 장기적으로 보면 더 이득이다. 휴대폰은 사용을 험하게 할 수밖에 없으며 사용 환경이 극단적인 데다 충전과 방전도 잦다는 결정적인 핸디캡이 있다. 따라서 무거운 태스크를 수행하기 위해 고스펙 휴대폰을 마련하기보다는, 각각의 기기를 오래 쓸 작정으로 기능을 분리하는 것이 더 경제적일 수 있다.
라이트닝 젠더
마지막은 충전기 문제다. 휴대폰은 아이폰에 노트북은 그램, 태블릿PC는 갤탭 쓰는 사람은 외출 시 충전기를 3가지 챙겨야 한다. 모든 제품을 애플로 맞춰도 라이트닝 젠더와 C타입 케이블로 2가지다.
하지만 나는 외출을 할 때 C타입 맥북 충전기 하나만 챙기면 된다. 물론 배터리 전압이 안 맞지만, 어차피 급한 충전용이니 이 정도는 괜찮다. 맥북을 안 가지고 나갈 때에도 아이패드 충전기를 가지고 나가면 휴대폰과 아이패드 모두 충전 가능하다.
또 맥북 프로와 아이패드 프로 충전기는 CtoC이기 때문에 실수로 배터리가 적게 남은 기기를 들고 나갔는데 충전할 곳이 없으면 긴급히 수혈할 수도 있다. 충전기를 못 챙겼다면 쉽게 빌릴 수도 있다는 것도 큰 장점. C타입 충전기는 어딜 가나, 일행 중 한두 명한테는 무조건 있기 때문이다.
"아이패드랑 맥북 쓰면서 왜 휴대폰은 아이폰이 아니야?"라는 질문을 여러 번 받아서 문득 생각나 적어 봤다. 기기 계획을 짜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기를!